[임관수 칼럼] ‘너와 나’를 우리로 만들어주는 이름 불러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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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관수 칼럼] ‘너와 나’를 우리로 만들어주는 이름 불러주기
  • 임 관 수(평론가)
  • 승인 2022.07.18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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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관수(평론가)
임관수(평론가)

귀순 어부의 강제북송 문제가 각종 언론매체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들이 쓴 20장 분량의 자기소개서에는 귀순의사가 담겨 있다고 하니 귀순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나는 2007년도에 UCLA 한국학 연구소에 Visiting Scholar로 갔을 때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는 노무현 대통령 때였다. 그곳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교민들이 여성 중년의 탈북이민자에게 의족을 기증하는 행사가 실려 있었다.

그녀는 탈북을 하다가 발각되어 무릎 밑, 발목 윗부분을 절단 당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북을 향한 집념은 막을 수 없어서 한국에 입국을 타진했더니 남북관계를 해칠 수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 미국으로 왔다고 하였다.

이 때 나는 그냥 그분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미국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 분의 앞날에 대해 걱정을 해보기도 하였다. 가끔 ‘그 분의 이름이라도 알아들 걸’ 하는 아쉬움이 들곤 한다.

귀순어민 북송 논란을 보면서 내가 미국 이민을 온 탈북여성을 생각하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 때 탈북자를 대하는 입장과 그 비서실장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탈북자를 홀대하는 입장이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19년 귀순어민 북송 이후 2020년 국내 입국 탈북자수는 229명(2019년 1,047명)으로 급감했다. 태영호 의원은 “북한체제유지에 가장 위협적인 탈북자 문제를 문재인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준 셈”이라고 하여 이 사건의 본질을 잘 포착하고 있다. 따라서 문제가 잘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북한주민들이 귀순을 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귀순어민들이 20장이나 되는 자서전을 통해 귀순의사를 밝혔다고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아무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제해결의 진정성을 믿을 수 없게 만든다.

이름의 의미를 다룬 시로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를 통해 귀순어부의 북송에 대한 문제 해결 단계를 보면, 우리가 아직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가 귀순을 하고, 북한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시멘트 벽에 머리를 박고 피투성이가 된 것, 그것들은 나와 관계가 없는 그만의 몸짓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2연부터는 귀순어부의 입장에서 보면 좋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에서 대한민국을 사랑했기에 대한민국의 땅을 밟은 어부의 희열이 느껴지지 않는가? 3연에서는 절규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나는 귀순 어부이지 범죄자가 아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달라 이 빛깔과 향기를 보아라.”라는 피울음이 들리는 듯하다. “그에게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즉 “남한에 가서 남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던 귀순어부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것은 너와 내가 만나서 우리가 되는 인간관계의 형성을 시사해준다. 그러나 남한 사람과 어울려 살고 싶어하던 귀순어부의 이러한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너는 너대로 북한에 끌려가고, 나는 나대로 남한에서 살고 있다.” 너는 너, 나는 나인 것이다. 이제 너와 내가 우리가 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밖에 없다. 그들의 탈북과 귀순이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탈북어부, 귀순어부가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들은 북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고 한다. 김소월의 “초혼”을 그들의 영전에 바치고 싶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심중에 남아 있는 / 말 한마디는 /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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